밤새 총총하던 별이 희뿌연 안개에 한 자락씩 덮여갔다.
밤뿐인 줄 알았던 숲은 주홍빛도, 금빛도, 바닷빛도 품고 있었다.
검은 길목이 꼬리를 숲으로 감추고 바람이 뒤를 좇았다.
해가 나뭇가지를 딛고 오르자 황금 잎이 한 움큼씩 떨어지면 날았다.
명아주와 쇠비름꽃 사이로 들어간 잎은 곧 녹색을 빨아들였다.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새들이 속살거렸다.
새들은 정말로 있는 것일까. 나무는 살아 있을까.
이곳은 무덤이었다. 오직 한 사람이 묻혀 있으며 또 한 사람의 인생도 묻혔다.
무덤 주위에 자란 꽃은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축제의 화관을 위해 뽑지 않는다.
연인의 관 곁에서 잠을 자고 또 자는 동안 숲이 자라났다.
마법은 모두 봉인에 바쳐지고 남은 것은 한 줌뿐인데 어디에서 그런 힘이 왔는지 몰랐다.
바다를 떠나 흙에 박힌 돌 닻은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 것들이 흘러가지 않도록 지켜왔다.
봉인, 마음, 기억, 약속.
...
옛 왕국 가나폴리의 피 흘리는 창, 마법사의 부러진 손.
내게 이것의 봉인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
그 이유만으로도 이는 내가 마땅히 할 일이겠지.
나 하나가 영원을 지새우며 받을 고통은, 결코 이 세계보다 중한 것이 아니니.
...
“계약의 이행자가 어떤 것인지 알아?
약속의 사람들, 그들은 내 것을 모조리 가져가고도 모자라 내가 그들의 종이 되길 원했지.
백번 양보해 그곳에 내 몫이 없다 해도, 내 명예는 어디에 있지?
내 명예를 지켜주어야 할 그는 무엇을 했지?
난 내게 치욕을 주는 방식으로 남을 사랑하지 않아.
계약의 이행자란, 내게 명예를 버린 채 자신 곁에 남아 달라고 한 그사람의 모습이지.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그의 모습, 그의 비겁함.
그 모습만은 내 혼이 먼지가 될 때까지도 용서할 수 없어. 다시 천 년 동안 그를 사랑하더라도.”
...
“이카본은 한 번에 아주 많은 걸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지.
한 개의 마음 속에 수백 개의 마음이 들어 있지.
한 명에게 온 마음을 주고도 다시 수백명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가 있지.
이윽고 선택의 때가 왔을 때 그는 어느 것도 버리지 않으려 했어. 제 손으로 어느 쪽도 택하지 않으려 했어.
그 결과 내가 남겨진 거지. 나는 홀로일 수가 있지만, 끊임없이 요구하는 그들은 결코 홀로일 수가 없으니까!”
분노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리는 순간 보이지 않는 천장, 또는 허공 자체가 진동했다. 그들의 옷자락까지 흔들렸다.
“그래서야. 그래서 너를 용서 못해. 끝내 계약의 이행자가 되려 하는 너. 방금 네가 한 말은 이 자리에 이카본이 있었다면 했을 말 그대로니까!”
메아리처럼 남은 목소리의 잔상만이 사방의 공기를 흔들어댔다.
마법사이기 때문에 목소리에조차 마력이 깃든 것일까.
아니면 이 울림은 한 사람이 수백 년간 간직해 온 분노가,
고통이 처음으로 마음 밖으로 쏟아졌기 때문일까.
비가...
오랜만에 깨어났건만 비가 내리는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