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 23년(972)에 서희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송(宋)에 갔는데, 당시 송에 조회하지 않은 지가
10여 년이 된 터에 서희(徐熙)가 이르러 몸가짐을 법도에 맞게 하니, 송 태조(太祖: 조광윤)가
이를 높히 여겨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를 제수하였다."
《고려사 열전, 서희》
"(고려가) 거란의 침략 행위를 보복하기 위해 원욱(元郁)을 송에 보내 원군을 요청하도록 했으나,
송은 북방의 국경이 겨우 평안해졌는데 군사를 가벼이 움직이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면서 사신을
후하게 대접만 하고 돌려보냈다. 이때부터 송과의 외교관계를 끊었다."
《고려사, 성종 13년 6월》
"호순지(胡順之)가 청주(靑州)의 종사(從事: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가 되었다.
고려가 사신을 보내오자 환관이 끼고는 중요하다고 여겨 청주의 관원으로 하여금
성(城) 밖의 교(郊)에서 고려 사신을 맞이하게 하였다. 호순지가 “청주는 큰 군진
(軍鎭)이다. 당나라 때에 신라(新羅)와 발해(渤海)를 맡았는데, 어찌 (고려에게는)
이 같이 비굴한가?”라고 말하고는 홀로 고려 사신에게 절하지 않았다."
《송사 권 303 열전 62, 1020년(귀주대첩 이듬해) 4월》
"그 조(詔)에 이르기를, 그대(고려 현종)는 대방(大邦: 큰 나라, 고려)을 맡아 조상의
공업을 계승하고서 난해(蘭陔: 현종이 부모인 '안종 욱'에게 효도하는 마음)의 봉양을
잃어버림을 생각하고 바람과 나무의 때가 어긋남을 슬퍼하며 사찰을 크게 지어 ··· "
〈현화사비〉
"천성(天聖) 3년 거란이 일찍이 고려를 정벌하였습니다. ··· 고려가 거란 병사 20만을 살해하여 한 필의 말과
한 척의 수레도 (거란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거란이 (고려를) 항상 두려워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조정[송]이 만약 고려를 얻는다면 거란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나서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헤아리건대 거란이 반드시 고려가 후환이 될 것을 의심하여 끝내 감히 무리를 다하여 남하하지 못할 것
입니다. 다만 이는 (고려의 마음을 얻는 것은) 중국의 큰 이로움입니다."
《속자치통감장편 권 150, 송 인종 경력 4년 6월》
"조정(朝廷)에서 의논한 사람들도 거란(契丹)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기 위하여 고려와 우호(友好)를
맺어야 한다고 하니, 신종(神宗)은 그렇게 하도록 윤허하고, 나증(羅拯)에게는 대우를 후하게 하겠다는
뜻을 고려(高麗)에 알리도록 하였다. 휘(徽: 고려 문종)가 마침내 민관시랑 김제(金悌) 등 백여 명을 파견
하니, 그들을 하국(夏國: 서하)의 사신들과 똑같이 대우하도록 조칙(詔勅)하였다."
《송사 제487권 열전 제246 외국3, 고려전》
"고려 사신은 폐백을 관리에게 보내면서 편지 끝에 날짜를 갑자(甲子)만을 썼더니, 동파는 이를
물리치면서, “고려가 우리 조정[송]에 신하로 자칭하면서 연호를 쓰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받겠는가.” 하니, 사신은 글을 바꾸어 ‘희령(熙寧 당(唐)의 연호)’이라 쓰자, 그제야 체례(體禮)
에 맞았다 하고 받았으니, 이것은 (소)동파의 묘지(墓誌)에 실렸다. "
〈박지원, 동란섭필(銅蘭涉筆)〉
"군(郡)·현(縣)에서 고려(高麗)의 사신을 접대하는 옛 준례가 없어 (송나라의) 백성들이
퍽 괴로웠는데, 이제 규정을 만들어 반포(頒布)하고, (고려 사신 접대에 소모되는) 비용은
모두 관(官)에서 지급하도록 조칙(詔勅)하였다."
《송사 제487권 열전 제246 외국3, 고려전》
"희녕(熙寧) 9년(A.D.1076; 高麗 文宗 30)에 또 (고려에서) 최사훈(崔思訓)을 보내 오자, 중귀
인(中貴人: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리던 환관)에게 명하여 도정(都亭)·서역(西驛)의
예(例)에 따라 객관(客館)을 수리하여 고려 사신들을 더욱 후하게 대우하도록 하니, 사신으로
오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송사 제487권 열전 제246 외국3, 고려전》
“1084년 고려사신 숙소인 고려정(高麗亭)을 지으라는 황명을 내리자 하이저우 등 두 고을에는 심한 동요가 일었다.
(송나라의) 백성들 가운데는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다. (백성을) 오랑캐[고려]에게 다 주어 노비가 되게 했으나 저들한테
서 얻은 건 뭔지 모르겠구나. ··· 이듬해(1085년) 내가 그곳을 지나다 고려정의 장려함에 탄복해서 시 1수를 남긴다.”
〈소식시집〉
“고려 사신 접대 비용 10여만 관이면 굶주린 (송나라의) 백성 수만 명을 살릴 수 있다”
〈소동파, 걸금상려과외국장〉
"원풍(元豊) 원년(A.D.1078; 高麗 文宗 32)에 처음으로 가좌간의대부(假左諫議大夫) 안도(安燾)·가기거사인(假起居舍人)
진목(陳睦) 등을 고려(高麗)에 파견하여 빙문(聘問)하였다. 명주(明州)에서 배 두 척을 제조하였는데, 하나는 능허치원안제
(凌虛致遠安濟)요 다른 하나는 영비순제(靈飛順濟)로서 모두 신주(神舟: '신령스러운 배'라는 뜻으로, 송에서 고려 측에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할 때 사용한 길이가 100m에 가까운 거대한 선박)라고 불렀다."
《송사 제487권 열전 제246 외국3, 고려전》
"일찍이 고려의 사신이 들어오면 명주(明州)와 월주(越州)는 그들의 대접으로 곤란하고, 조정은 관우(館遇: 객사에서 대접),
연뢰석여(燕賚錫予: 잔치를 열고 물품을 나누어 주는 것 )등의 비용이 거만(數萬: 천문학적인 금액)을 헤아리는데, 여기에
고려 임금에게 주는 예물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송] 사신이 고려에 가면 매번 두 척의 신주(神舟)를 탔는데, 그 건조와
운영 비용 역시 막대했다. 삼절(三節: 뛰어난 재능)로 임명된 관리들이 (나라의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자기 관직에 따라
봉록(俸祿: 월급)을 덜어서 모두 (縣官: 담당 관청)에 맡겨 비용을 충당했다."
《송사 제487권 열전 제246 외국3, 고려전》
"회동제거(淮東提擧: 회동 지역의 특정 업무를 책임지는 관리) 황실(黃實)의 말로는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의 이야기로서, 보낸 선물 중에는 가짜 금은(金銀) 알이 있었는데, 고려인들은 모조리 깨뜨려 알맹이
까지 쪼개 보니 사신들은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때 고려 사람들은, ‘감히 우리가 오만한 것이 아니라,
혹시 거란 사람들이 보고 진짜로 여길까봐 걱정스러워서 그러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박지원, 동란섭필(銅蘭涉筆)〉
" ··· ( 소동파가) 항주(杭州) 통판(通判: 지방 장관의 권한이 비대해지는 것을 막고 감찰과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송 태조가
부(府)나 주(州)에 창설한 직책)으로 있을 때 고려의 사신이 (송나라) 주군(州郡)의 관리를 능멸(凌蔑)하고, 당시 사신을
인도하는 (송나라의) 관리들이 모두 관고(管庫: 창고의 관리)로서 (고려 사신의) 세도를 믿고 제 맘대로 날뛰어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 하여,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먼 지방 사람들이 중국을 사모하여 오니 반드시 공손하여야 할 터인데, 지금
보니 이렇게도 방자하니 이는 너희들이 잘못 지도한 것이라, 만일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마땅히 황제께 아뢰리라.” 하니,
인도하던 관리들이 두려워서 수그러졌다."
〈소식, 묘지(墓誌)〉
"원우(元祐) 4년(A.D.1089; 高麗 宣宗 6) 에 그 (고려 문종의) 왕자(王子) 의천(義天)이 승려 수개(壽介)로 하여금
항주(杭州)에 와서 망승(亡僧: 세상을 떠난 승려)에게 제(祭)를 올리도록 하였는데, 수개가 “국모(國母)가 두 금탑
(金塔)을 가지고 가서 양궁(兩宮: 두 분의 왕 또는 왕비)의 장수(長壽)를 위하여 바치도록 하였습니다.”라고 하자, 당시
지주(知州: 주의 행정 사무를 총괄하는 지방 장관)였던 소식(蘇軾)이 이를 거절하자고 상주(上秦)하였는데, ··· "
《송사 제487권 열전 제246 외국3, 고려전》
"원우(元祐) 5년(A.D.1090; 高麗 宣宗 7)에 (고려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와서, 은기(銀器) 5천벌을 하사하였다.
/ 원우(元祐) 7년(A.D.1092; 高麗 宣宗 9)에 황종각(黃宗慤)을 보내와 『황제침경(黃帝鍼經)』을 바치면서 구입
해 가겠다는 서책이 매우 많았다. 예부상서(禮部尙書: 오늘날의 교육·문화·외교부 장관) 소식이, “고려가 들어와
조공(朝貢)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만 있습니다. 지금 요청한 서책과 수매해 가는 금박
(金箔) 등은 모두 다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하고 아뢰니, 조칙(詔勅)을 내려 금박만을 수매하여 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끝내 (고려 사신 황종각 등은) 『책부원귀(册府元龜)』도 구입하여 귀국했다."
《송사 제487권 열전 제246 외국3, 고려전》
"정화(政和) 연간(A.D.1111~1117; 高麗 睿宗 6~12) 에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國信使: 신의를 바탕으로 맺어진
대등한 나라의 외교 사절)로 승격시켜 예우(禮遇)가 서하국(西夏國)보다 위에 있었고, 요(遼)나라 사신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에 예속시켰으며, 인반관(引伴官)·압반관(押伴官) 등도 고쳐 접관반(接館伴)·송관반(送館伴)이라
하였다. 『대성연악(大晟燕樂)』 과 변두(籩豆)·보궤(簠簋)·존뢰(尊罍) 따위의 그릇 등도 하사하고, 심지어는 예모전
(睿謨殿) 안에서 고려(高麗) 사신을 위하여 연회(宴會)까지 베풀었다."
《송사 제487권 열전 제246 외국3, 고려전》
"임금(고려 예종)이 ··· 송나라에 가는 사신을 통해 명필로 쓴 편액을 구하자, 그 말을 들은 송 황제가 손수
불전(佛殿)의 편액에 ‘능인지전(能仁之殿)’이란 글씨를 써 주고, 태사(太師) 채경(蔡京)을 시켜 절 문의 편액
으로 ‘정국안화지사(靖國安和之寺)’라는 글씨를 쓰게 해서 보내 주었다.
《고려사, 예종 13년 4월》
" ··· (고려의) 사신이 지나가는 곳마다 배를 모는 선원[調夫]이 배를 운행하는 데에 소란스럽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손부(孫傅)가 “백성의 힘을 쓰면서 농사일을 방해하고 중국에 터럭만큼의 이익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재상이
그의 주장이 소식(蘇軾)과 같다고 하여 폄출하여 기주(蘄州)에 안치할 것을 아뢰었다. 급사중(給事中) 허한(許翰)은
손부의 논의가 비록 소식과 짝을 이루어 부합하나 의도는 또한 그와 같지 않으며, 직사(職事: 직무에 관계되는 일)로
일을 논한 것인데 책임이 지나치다 하였다. 허한 또한 파직되었다."
《송사 권 353 열전 112》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고려의) 축하 사신이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 어사(御事) 호순척(胡舜陟)이
“고려가 50년 동안이나 국가(國家: 송)를 미폐(靡敝: 피폐해지고 쇠약해짐)케 하였으니 정화(政和)
이후로는 사신이 해마다 와 회(淮)· 절(浙) 등지에서는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 고려의 사행
(使行)을 중지시켜 오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아뢰었다. ··· "
《송사 제487권 열전 제246 외국3, 고려전》
"송(宋)의 사신 후장(侯章)이 객사(客舍)에 머물며 또 임금(고려 인종)에게 글을 올리기를, “우리는 황제의 뜻을 받들어 고려(高麗)에 왔습니다.
우리나라 선대 황제들은 요(堯)·순(舜)과 같은 정치의 도를 행하여 천하의 교화를 근본으로 힘썼으며, 귀국[고려]과 수호를 맺은 지 거의 200년
동안 예의를 갖추지 않은 적이 없었고 우리 도군태상황제(道君太上皇帝: 송 휘종)도 이를 계승하여 은혜의 융숭함을 더욱 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 간악한 자들의 주장에 따라 국경지대에 소요가 일어나자, 금인(金人)들이 어지럽게 일어나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키고 오합지졸을
모아서 대비를 못한 우리 중원(中原)을 급습하고 소란하게 하면서 위협과 약탈을 함부로 자행하였습니다. 당시 황제를 호위하던 군사가 수백만
에 달하였으므로 우리 대신들이 건의하여 아뢰길, ‘황하(黃河)의 남쪽에서 공격하지 말고 대하(大河)의 북쪽에서 맞아 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깊숙이 들어왔을 그 때 바로 대군을 한 번에 일으킨다면 남김없이 무찌를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황제가 등극한 초기여서
효도하고 우애롭고 공손하고 검소하게 지내며, 밤낮으로 침식(寢食)을 잊고 정무를 돌보며 어질고 재능 있는 인재를 등용하여 신의(信義)를 돌보
느라 미처 적군을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금인들도 잘못을 뉘우치고 화의를 청하며 자기 나라 사막으로 돌아갈 길을 터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에 황제는 값진 물품을 주어 군사들을 위로하는 밑천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금인들은 다시 끝없는 욕심을 부려 하북(河北)의 관진(關鎭)
을 넘보고 있으니, 천인(天人)이 모두 분노할 일입니다. 일이 어쩔 수 없게 되었으니 서늘한 가을을 기다려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때에 귀국이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겠습니까? 국경 지역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함께 적[금]을 소탕한다면, 이로써 무궁한 우호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황제께서 별도로 사신을 보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인종 4년 7월》
"임금(고려 인종)이 대답하기를, ··· "명을 받들고 온 선찬(宣贊)이 전하는 조서(詔書)를 보니, 금인(金人: 금나라 사람)들이 도리에 어긋나게 간사하고
횡포함이 점점 심해져서 장차 천하의 군대를 일으켜 하찮고 추악한 자들의 죄를 묻고자 하면서 우리나라[고려]도 군사를 이끌고 서로 하나가 되어 적
에게 천벌을 내리자고 하였소. 나는 조서를 처음부터 받들어 읽으면서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소. 생각하건대, 금인들은 처음에 우리나라에 신하로
복속하여서도 항상 침입하여 약탈하기를 일삼았지만, 우리나라는 변방의 사정이 겨우 안정을 찾았던 터라 불필요한 사단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그들
이 침략해 오면 무찌르고, 물러나면 수비하여 지켰으니 이들[여진]을 대하는 근본 정책은 굴레를 씌우듯 얽매고 구속한다는 기미(羈縻)에 있었소. 그런데
우리 숙종(肅宗)의 재위 기간 중에 추장(酋長) 영가(盈歌)가 힘으로 다른 무리를 제압하고 권위로 여러 부족을 항복시키고는 백산(白山)을 엿보면서 자주
우리 국경을 침범하였소. 오달(吳達)과 혜노(惠奴)가 서로 계승하면서 흉악한 세력을 더욱 떨쳐 일으켰소. 이전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이 금[大金]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송의 사신이 금[蕃土]에 도착하였는데, 예우하는 것이 전에 항복한 북요[北遼]의 사신을 대우하는 것과 거의 똑같았습니다.’라고 하였소.
또 국경지역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금인이 거란(契丹)을 함락시키고 드디어 송의 국경까지 침범하였으나, 황제가 등극한 초기라서 그들을 섬멸하려하지
않고 그들이 화친을 요청하자 허락하셨다.’라고 하였소. 중국처럼 큰 나라도 이러한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고립되어 있어 장차 무엇을 믿겠소? 올 4월에 특별
히 사신을 파견하여 수호를 맺자고 하였으나 벌써 여러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회답이 없었소. 다시 생각하여도 우리나라는 천재지변이 잦아서 창고가 모두
비었소. 적을 방어할 수 있는 무기 또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어서 기술자들을 모아 복구할 계획이오. 조서에 소상하게 타일러 알려준 대로 지금이 바로 과거의
수치를 설욕하고 큰 은혜에 보답할 날이오. 그러나 우리의 모자라고 나약한 병사들로 새롭게 승기를 잡은 오랑캐를 당해낸다는 것은 억지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하오. 다만 군사를 훈련시키고 기계를 정비하였다가 귀국[송]의 군대가 저들[금]의 국경을 제압하게 되면 우리나라가 감히 서로 하나가 되어 힘을 다
하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고려사, 인종 4년 7월》
"양응성(楊應誠) 등이 사관으로 돌아가서 다시 어록(語錄)을 임금(고려 인종)에게 올려 아뢰기를, ··· "삼가 생각하건대 귀국[고려]은 바다 동쪽에 있는 나라 중 가장 큰 나라로 불리며, ··· 거듭 생각하건대, 귀국은 예를 지키며 의를 소중히 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송]를 은혜로 대우한 지 여러 해가 되어 다른 나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만일 귀국의 길을 통해 두 황제(송 휘종, 흠종)를 모셔 오게 된다면 2백 년 동안 충순해 온 의리를 훼손시키지 않을 것이며, 또한 선대 황제께서 귀국을 우대하여 온 은혜에 보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귀국의 공로에 대하여 예전의 배로 갚을 것이며, 사방의 모든 나라가 귀국의 영예로운 명성을 더욱더 우러러보고 높은 의리에 믿고 복종할 것이니 진실로 무궁한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 라고 하였다."
《고려사, 인종 6년 6월》
" ··· "저 금(金)은 우리[고려]와는 압록강을 경계로 접하고 있고 이미 중국을 침범한 기세를 타고 있으며, 또 이웃나라를 해치려는 뜻을 품고 항상 남몰래 염탐하며 빈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만약 귀국[송]의 사절이 우리로부터 길을 빌렸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반드시 그 때를 맞추어 (금나라가) 일을 일으킬 것입니다. 혹은 군사를 일으켜 위협하고 문책을 가하거나, 혹은 답례의 사절을 보내는 것을 핑계대고 통행을 요청할 것이니 우리나라는 요충에 위치해 있으면서 장차 무슨 말로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고려사, 인종 6년 8월》
"건염2년(建炎二年)10월에 대궐에 이르러 입대(入對: 임금을 뵘)하여 그 상황을 아뢰니, 고종(高宗)은 해(楷: 고려 인종)가 국은(國恩을 저버렸다고 대단히 노하였다. 상서우승 주승비(朱勝非)가, “고려(高麗)가 금(金)나라 사람과는 인접하여 있고 중국과는 바다로 막혀 있으므로 이해가 매우 분명합니다. 과거에 고려를 너무 후하게 대우하였지만, 지금 어떻게 그 보답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아뢰자, 우복사 황잠선(黃潛善)은, “큰 전함에 정예병 수만 명을 싣고 가 곧바로 고려의 도읍지를 공격하면 저들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아뢰었다. 그러자 주승비가, “바다를 건너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연산(燕山)의 사적(북송이 연운 16주 중 하나인 연산[지금의 베이징]을 무리하게 되찾으려다 결국 중국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재앙인 '정강지변'을 초래했던 뼈아픈 실책)이 가까운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하고 아뢰니, 상(上)이 노여움을 풀었다."
《송사 제487권 열전 제246 외국3, 고려전》
"앞서 이심(李深)과 지지용(智之用)이 송인(宋人) 장철(張喆)과 함께 공모하여, 이심의 이름을 동방흔(東方昕)으로 바꾸고 송 태사(太師) 진회(秦檜)에게
서한을 보내려 하였는데, “만약에 금(金)을 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고려에게 길을 빌리겠다 하고 우리가 내응한다면 고려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지지용이 그 서한과 함께 유공식(柳公植) 집에 숨겨 두었던 고려 지도를 송 상인 팽인(彭寅) 편에 부쳐 진회에게 올리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송 도강(都綱) 임대유(林大有)가 서한과 지도를 획득해 알려왔으므로 그들을 옥에 가두고 국문하니 모두 자백하였다. 이심과 지지용은 옥중에서 죽었고
장철은 복주(伏誅: 형벌을 받아 죽음을 당하는 것)되었으며, 그 처들은 모두 먼 섬으로 유배 보내었다."
《고려사, 의종 2년 10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