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교복을 막벗은 나는 한 여자애를 만났었는데 그애는 고등학교 한학년 후배로


사춘기 초입의 소녀같은 얼굴에다 창백한 피부색을 가진 병적인 매력이 있는 아이였다.


글래머러스한 스타일이었던 그녀는 이상한 의미로 가슴이 지나치게 컸었다. 저게 왜 저기 붙어있지?


그 애를 볼 때마다 이런 느낌이 들 정도로. 아직 어렸던 20살 때라 그런지 그런 그애를 만날때면 



어쩐지 나쁜짓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음란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그아이에게 있었다. 입으로는 귀엽다 어쩐다 하면서 나는 분명히 내내 안고 뒹굴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 차이에서 느껴지는 자괴감에는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사실 내가 18살. 그러니까 그애가 17살때 난 한번 고백했다가 차였던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에 신입생으로 입학한 그 아이는 남자, 아니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엇인가를 


분명 가지고 있었다. 외우기 쉬웠던 이름과 - 식물의 이름이었다 - 큰 키가 아니었음에도 


사람을 내려다보는 고양이 같은 눈, 어지간해선 웃지 않았던 작은 얼굴과 흉흉한 소문들.


그런 이질적인 것들이 그녀 안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한번은 지각을 해서 담을 넘으려고 철조망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옷이 찢어질까 다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이, 내 옆에 불현듯 나타난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담을 훌쩍 


넘어가 버렸다. 사뿐이 착지한 후 그녀는 날 보고 웃었다. 난 아마 그때 반했던 것 같다. 



전화번호를 구하는것도 쉬웠다.


입학하자마자 아이돌로 등극한 그애의 전화번호는 남자교실 칠판에 적혀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높은 경쟁율 속에서 겨우겨우 한번 만나게 되었다, 




당시 17살에 지나지 않았던 그녀는 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뭐랄까, 남자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어떻게 하면 남자가 목을메고, 애타 하는지를 렙하는 흑인처럼 잘 알고 있던 것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일에 관한 한 갓난 아기, 아니, 태아, 혹은 짚신벌레정도에 불과했던 


나는 결국 앞 뒤 재지 않고 사귀자고 달려들었다가 결국 서먹한 관계가 되고 말았었다. 


그 후론 어찌 된 일인지 학교에서도 한번도 마주친 적 조차 없었다. 굳이 피하거나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러다 20살이 되어서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우연히 다시 마주치게 된 그애는. 이럴수가, 전에 말했던 그 이상한 능력만이 기형적으로 


발달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게 또 저 어울리지 않는 큰 가슴이랑 묘하게 조화로워서 이건 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난 18살 때의 기억을 떠올려서 이제 같은 실수는 두번 하지 않으리라고 그 애를 보는 


내내 다짐했다. 


두세달을 만나는 동안 그런 생각만 했던 것 같다. 만나면서 기분이 좋거나 즐거운 게 아니라


내 안의 무언가와 계속 맞서는 느낌이랄까? 서른이 다 된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의 나는 분명


이상했다. 


그리고 결국 사귀게 되었고, 네달이 좀 넘어서 결국 같이 자게 되었는데 그게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빨리 끝나버렸던 것 같다. 그 애는 웃었다. 담장을 넘었을 때의


그 웃음이었다. 


선천적으로 머리색이 옅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대부분 피부가 창백하고 눈동자가


갈색인 경우가 많다. 색소가 부족하다고 하던가? 


그녀가 그랬다. 


얼굴은 작고 머리는 풍성해서 단발로 잘라 놓으면 일본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고. 아, 가슴도. 그러고보니 그녀는 좀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소녀였다. 




헌데 그날 밤. 그녀가 현실로 들어왔다. 


17살때 나에게 고백 받은 이후,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그녀는 학교를 그만 둬 버렸단다. 


물론 나의 고백사건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그 직후 모습을 감춰서 좀 미안하게 생각했다나.


그리고는 2년동안 술집에서 일을 했다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밥을 먹었더니 배가 부르다는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얘기 했다.


인기도 좋고 해서 지금은 어떤 아저씨한테 용돈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면서, 또 웃었다.


놀라기도 하고, 정신이 아찔해지기도 했는데 그것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웬지 이 아이와 그런 일들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좀 추운 날이어서 그 아이의 집을 나올 때 잠바를 하나 얻어입고 밖으로 나왔다. 


3월 말 쯤 됐던것 같다. 


그 애 한테는 좀 독특한 향기가 있었다. 어른과 소녀의 경계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그 간극을 횡으로 파고 드는 듯 한, 허무한 느낌의 향기였는데 그게 그 잠바에서도 


나고 있었다. 


여자애 잠바를 얻어입고 탄 택시 안에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그 아이의 옷냄새를 맡아 대었다. 



그 아이와는 몇 달 후 뒤끝이 좋지 않은 이별을 하고, 나는 군대를 가게 되었으며 그녀는


또 어딘가의 부자와 외국으로 갔단다. 


나중에 알아낸 그 향수를 나는 한동안 뿌리고 다녔었다. 새로 사귄 여자친구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를 했고, 나는 웃었다. 이제서야 그 아이의 웃음의 의미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