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시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는가


도시는 단순히 사람이 모여 사는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환경이고, 그 환경은 생각보다 훨씬 깊게 우리의 감정과 에너지를 결정한다. 우리는 흔히 도시를 기능으로 이해한다. 얼마나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지, 얼마나 경제적으로 효율적인지. 그러나 정작 중요한 질문은 자주 빠져 있다. 이 공간이 인간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가, 그리고 그 느낌이 어떤 삶을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신경과학과 환경심리학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질문에 꾸준히 답해왔다. 인간의 신경계는 환경에 끊임없이 반응한다. 공간의 크기와 비례, 빛의 방향, 소리의 밀도, 시야의 복잡성—이 모든 요소가 뇌의 작동 방식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레이첼 카플란과 스티븐 카플란의 주의력 회복 이론(Attention Restoration Theory)에 따르면, 인간의 집중력은 자연환경이나 복잡성이 낮고 질서 있는 공간에서 회복되며, 과도한 자극 환경에서는 지속적으로 소모된다. 도시 설계는 따라서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공중보건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부터 도시를 걷는 것이 피곤해졌다. 특별히 힘든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길을 몇 분만 걸어도 머리가 무거워지고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처음에는 단순한 컨디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다. 잠을 덜 잤거나,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넘겨버린다. 그러나 이 피로는 반복된다. 장소를 바꿔도, 시간을 바꿔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문제는 개인의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놓여 있는 환경에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2. 거리의 소음: 시각적 과부하와 간판 풍경


길을 따라 늘어선 간판들을 보면 그 이유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각자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최대한 튀어나온 글자들, 서로 다른 색과 조명이 충돌하는 표면, 크기와 위치에 아무런 기준이 없는 정보들. 하나의 거리 안에 수십 개의 메시지가 동시에 외쳐지고 있다. 모두가 더 크게, 더 강하게 보이려고 한다. 그 결과는 역설적이다. 아무것도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시선은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동한다. 뇌는 들어오는 정보를 정리하려 하지만, 그 양이 과도하다.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기도 전에 새로운 자극이 덮쳐온다. 결국 우리는 그 공간을 이해하지 못한 채 통과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가 쌓인다. 이것은 단순히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지속적인 정보 처리 실패에서 오는 피로에 가깝다.
이 현상을 이해하는 데 '시각적 복잡성(visual complexity)' 개념이 유용하다. 시각적 복잡성이 낮으면 단조롭고 지루하며, 지나치게 높으면 불안과 피로를 유발한다. 인간이 쾌적하게 인식하는 환경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예측 가능한 구조 안에 적당한 다양성이 깃든 상태. 도시 거리의 간판 풍경은 이 균형에서 극단적으로 이탈해 있다.

서울 도심의 상업 가로를 예로 들면, 1층부터 5층까지 모든 입면이 간판으로 덮여 있는 경우가 흔하다. 법적으로는 규제가 있지만 실질적인 집행은 미약하고, 개별 업체의 가시성 경쟁은 전체 환경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것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공유지의 비극'과 정확히 같은 구조다.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행동이 집합적으로 공동의 환경을 파괴한다. 간판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어떤 간판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고, 거리 전체는 시각적 쓰레기장이 된다.

일본의 일부 상업지구나 유럽의 구시가지에서 통일된 간판 기준이 적용될 때 거리가 얼마나 다른 인상을 주는지는 직접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건물의 형태가 읽히고, 보행자의 시선이 머무를 수 있는 지점이 생기며, 거리 자체가 하나의 공간으로서 경험된다. 이것은 단순히 아름다움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이 정보로서 작동하는 방식의 문제다.

 


3. 고층아파트: 인간의 척도를 지운 풍경


반대로 고개를 들어 올리면 또 다른 종류의 압박이 존재한다. 하늘을 가로막듯 서 있는 고층 아파트들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반복은 인간적인 감각을 지워버린다. 비슷한 창문, 비슷한 색, 끝없이 이어지는 수직의 선들. 그 구조는 질서 있어 보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크기를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공간 속에서 방향을 잡기보다 압도당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건축과 도시설계에서 '인간 척도(human scale)'는 단순한 심미적 개념이 아니다. 얀 겔(Jan Gehl)이 수십 년에 걸쳐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인간의 감각 기관은 진화적으로 특정 거리 범위 안에서 주변 환경을 읽도록 설계되어 있다. 보행 속도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얼굴을 인식할 수 있는 거리는 약 20~25미터이며, 개별 건물의 디테일을 읽을 수 있는 거리는 약 50~60미터다. 30~40층짜리 아파트 단지는 이 범위를 근본적으로 초과한다. 하부 3~4층을 넘어가는 모든 층은 보행자에게는 단순한 수직 덩어리로 인식될 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고층 건물들이 단지 형태로 배치될 때 발생한다. 도로에서 후퇴한 위치에 세워진 거대한 판상형 또는 탑상형 아파트들은 지상부에 아무도 없는 넓은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 공간은 공원도 아니고, 광장도 아니며, 길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앞마당"이라는 명목으로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보행자가 통과하기 꺼리는 어색한 잔여 공간이다. 스케일이 맞지 않는 공간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느낀다.
특히 이런 공간에서는 "머무름"이 사라진다. 길은 통과하는 곳이 되고, 건물은 단순히 기능을 수행하는 구조물로 남는다. 그 사이에서 인간은 공간과 관계를 맺지 못한다. 어디에 서 있어도 비슷하고, 어디를 봐도 큰 차이가 없다. 개별적인 기억이 남지 않는 공간은 결국 삶의 밀도를 낮춘다.
이 두 가지 풍경은 서로 정반대처럼 보인다. 하나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러나 결과는 비슷하다. 둘 다 인간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다. 하나는 과잉된 자극으로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다른 하나는 비인간적인 규모로 사람을 위축시킨다.

 


4. 투기의 언어로 지어진 도시


한국 아파트의 문제를 논할 때, 단순히 건축 형식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아파트가 어떤 언어로, 어떤 목적으로 생산되어 왔는가에 있다.
한국의 아파트는 처음부터 주거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자산 증식을 위한 수단으로 기획되는 경향이 강했다. 1970~80년대 개발국가 시절, 정부는 주택을 복지의 대상이 아니라 경제성장의 도구로 보았다. 분양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입지와 브랜드로 가격 차별화를 꾀하며, 재개발과 재건축을 통해 끊임없이 자산 가치를 순환시키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 구조 안에서 아파트 설계의 우선순위는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팔릴 것인가가 먼저였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아파트 단지의 명명 방식이다. "자이(Xi)", "힐스테이트(Hillstate)", "아이파크(I'PARK)", "래미안(Raemian)", "더샵(The Sharp)"—이 이름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영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어원을 혼합하거나 아예 의미를 탈각한 기표들이다. 이 명칭들은 실제 장소, 역사, 지역 공동체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들이 말하는 것은 단 하나—고급스럽고, 그래서 비싸고, 그래서 안전한 자산이라는 이미지다.
이것이 투기 언어다. 공간의 실질적인 거주 환경—빛이 어떻게 드는지, 바람이 어떻게 통하는지, 아이들이 어디서 놀 수 있는지, 이웃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은 이 언어의 어휘에 없다. 대신 등장하는 것은 "브랜드 아파트", "역세권", "학세권", "남향", "84㎡(구 33평형)". 공간은 평수와 방향과 노선도로 환원된다. 삶의 질은 숫자로 치환되고, 숫자는 가격이 된다.
이 언어가 광고와 분양 시장을 지배하게 되면, 설계자와 건설사도 그 언어에 따라 움직인다. 내부 마감재의 등급과 커뮤니티 시설의 스펙은 높아지지만, 단지 외부와 맺는 관계—도로와의 접면, 저층부의 활성화, 인근 가로와의 연속성—는 무시된다. 단지는 그 자체로 완결된 폐쇄 공간이 되어간다. 도시의 나머지와 연결되지 않는 섬.
건설자본의 언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재개발·재건축 과정에서는 "사업성"과 "용적률"이 핵심 변수로 작동한다. 용적률이 높을수록 더 많은 세대를 팔 수 있고, 건설사와 조합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그 결과는 층수의 상향과 밀도의 극대화다. 그 공간에서 실제로 살아갈 사람들의 경험—일조권, 조망권, 공동 공간의 질—은 협상의 부산물로 취급된다.
맥락의 무시는 물리적 형태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경사진 지형 위에 평지형 단지를 올리고, 오래된 골목길의 구조를 지워 반듯한 격자로 정리하며, 기존 도시 조직과의 연속성 없이 높은 담장과 경비 초소로 경계를 세운다. 이 과정에서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장소의 기억은 지워진다. 새로 들어서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단지다. 단지는 도시 안에 있지만 도시가 아니다.

 


5. 우리는 왜 이것을 원했는가, 혹은 원한다고 믿었는가


여기서 질문 하나를 피하기 어렵다. 이 모든 것이 문제라면, 왜 이것은 계속 만들어지고 팔렸는가? 그리고 사람들은 왜 그것을 사려 했는가?
대답은 복잡하다. 먼저, 아파트가 제공하는 것들 중 실제로 좋은 것들이 있었다. 구식 주거 형식—연립주택, 다세대주택, 단독주택—이 갖지 못한 편의시설, 관리의 효율성, 내부 공간의 넓이, 그리고 물리적 안전감. 아파트는 이것들을 패키지로 제공했고, 이전 주거 환경이 충분히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 패키지는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더 깊은 이유는 구조적이다. 한국에서 자산으로서의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선택이 아니라 사실상 유일한 계층 이동 수단이었다. 임금 상승만으로는 중산층의 재무적 안정을 담보하기 어려운 구조에서, 부동산 가격 상승은 일종의 보험이었다. 이 상황에서 "좋은 입지의 브랜드 아파트"를 사는 것은 합리적 선택이었다. 문제는 그 합리성 자체가 왜곡된 구조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선택이 구조에 의해 제한될 때, 그 선택을 자유로운 선호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투기적 아파트 시장이 지속되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공임대주택의 절대적 부족, 전월세 시장의 불안정성, 재산세와 보유세 구조의 취약함—이 모든 요소가 결합되어 사람들을 아파트 소유로 떠민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원한다고 믿었던 것과 실제로 살아가는 것 사이의 간극은 어디서 드러나는가. 한 가지 단서는 이른바 "아파트 선호"의 세부 내용에 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고층 아파트 자체가 아니라, 넓은 실내 공간, 엘리베이터, 주차 공간, 보안, 그리고 관리다. 이 요소들이 낮은 층수의 도시형 주거, 혹은 잘 관리되는 중층 집합주거에서도 제공된다면, 고층 단지형 아파트에 대한 절대적 선호는 희석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그러한 대안이 충분히 공급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6. 피로의 축적: 공간이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


이러한 환경 속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에너지를 소모한다. 눈은 계속해서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이고, 뇌는 그것을 해석하려 애쓴다. 그러나 그 과정은 끝나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은 정보는 잔여물처럼 남고, 그것이 쌓이면서 피로로 전환된다. 이 피로는 즉각적으로 인식되지는 않지만, 하루가 끝날수록 분명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이 피로가 단순히 개인의 감정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더 쉽게 집중력을 잃는다. 작업의 깊이는 얕아지고, 사고는 단편화된다. 감정은 쉽게 소모되고, 작은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결국 일상 전체가 조금씩 거칠어지고, 삶의 질은 서서히 낮아진다.
이것은 추상적인 주장이 아니다. 스트레스와 도시 환경의 관계를 연구한 여러 연구들은 도시 거주자와 자연환경 거주자 사이에 코르티솔 수준, 우울 발생률, 사회적 불안 수준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남을 보여준다. 특히 앤드레아스 마이어-린덴베르크(Andreas Meyer-Lindenberg)의 연구에 따르면, 도시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사회적 스트레스 상황에서 편도체(amygdala)가 더 강하게 반응한다. 도시 환경은 뇌 구조 자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종종 삶의 질을 소득이나 편의시설로 판단한다. 더 넓은 집, 더 빠른 교통, 더 많은 서비스. 물론 그것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요소는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환경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갖추고 있어도, 그 공간이 지속적으로 인간을 피로하게 만든다면, 그 삶은 안정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이 문제는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장된다. 피로한 개인들이 모이면, 피로한 사회가 된다. 집중력이 낮아진 사회는 깊이 있는 판단을 하기 어렵고, 창의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힘들다. 감정적으로 소모된 상태에서는 협력보다 갈등이 쉽게 발생한다. 결국 도시의 질은 개인의 삶을 넘어, 사회의 방향까지 결정짓는 요소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환경에 너무 쉽게 익숙해진다. 매일 반복해서 보게 되면, 그것이 정상이라고 느끼게 된다. 불편함은 점점 둔해지고, 문제의식은 사라진다. 그러나 익숙함이 곧 적절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장 큰 문제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7. 대안은 존재하는가: 다른 방식으로 지어진 도시들


이 문제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같은 밀도의 도시, 같은 인구를 가진 도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어질 수 있다는 것은 세계 여러 도시의 사례가 보여준다.
암스테르담과 바르셀로나는 고밀도 도시다. 그러나 이 도시들의 밀도는 수십 층짜리 아파트 타워에서 오지 않는다. 5~8층 수준의 중층 집합주거가 블록을 꽉 채우고, 1층부터 지상부는 상점, 카페, 작업실, 공공 서비스로 활성화된다. 보행자는 어떤 블록을 걸어도 시선을 붙잡는 디테일과 사람의 활동을 만난다. 건물의 높이가 인간의 시야 범위 안에 있기 때문에 전체 입면이 읽히고, 거리는 정보로 가득하면서도 처리 가능한 수준을 유지한다.
비엔나의 공공주택, 이른바 '게마인데바우(Gemeindebau)'는 또 다른 모델을 보여준다. 대규모 사회주택 단지이지만, 도시 조직 안에 통합되어 있고, 지상부에는 공공 공간과 상업 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단지 안에 사는 것과 도시에 사는 것이 동일한 경험이 된다. 이것은 가능하다. 선택의 문제다.


일본 도쿄의 주거 지역을 걷다 보면 2~3층짜리 단독주택과 소규모 공동주택이 촘촘하게 배치된 구조를 만난다. 방재 규정 때문에 일정 도로폭 이상 확보되어 있지만, 건물들은 다양한 시기와 형태를 유지한 채 공존한다. 완벽하지 않고 때로는 어수선하지만, 그 복잡성은 인간 척도 안에 있다. 걷는 사람은 각 건물을 개별적으로 읽을 수 있고, 거리는 시간이 축적된 흔적을 가지고 있다.
서울 안에서도 단서들이 있다. 성북동, 부암동, 이화동 같은 동네들은 재개발 압력을 비교적 적게 받은 지역이다. 이 동네들을 걷는 경험은 서울 평균과 다르다. 건물의 층수가 낮고, 골목이 남아 있으며,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한다. 여기서 인간은 공간에 방향을 잡고, 기억을 만들고, 발걸음을 늦출 수 있다.
이 동네들이 좋은 것은 낡아서가 아니다. 척도가 맞고, 다양성이 있으며, 장소성이 있기 때문이다. 재개발이 이루어지더라도 이 성질들을 보존하거나 재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Bayerova, 체코의 공공주택

 


8. 제도와 설계의 전환: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


대안적 방향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크게 세 가지 영역에서 변화가 필요하다.
첫 번째는 공급 구조의 전환이다. 한국의 주택 정책은 오랫동안 민간 건설사를 통한 분양 아파트 공급에 의존해왔다. 이 구조에서는 사업성이 최우선이 되고, 설계는 그 제약 안에서 이루어진다. 공공이 주도하는 주택 공급의 비중을 높이고, 공공임대주택의 질을 높이며, 다양한 유형의 주거—소형 집합주거, 공동체 주거, 협동조합 주거—를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공급 주체가 다양해지면, 설계 언어도 다양해진다.
두 번째는 도시 계획 기준의 전면 재검토다. 현재 용도지역별 용적률과 건폐율 기준은 고층 고밀도를 구조적으로 유인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주어진 용적률을 효율적으로 쓰려다 보면 자연스럽게 타워형 고층이 나오는 수리적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 기준을 바꾸는 것—예컨대 높이 제한을 강화하되 건폐율을 높이거나, 지상부 용도 혼합을 의무화하는 방식—은 실질적인 도시 형태의 변화로 이어진다. 파리, 암스테르담, 바르셀로나가 특별히 아름다운 것은 건축가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도시 계획 기준이 도시 형태를 조형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공공 공간의 질에 대한 투자다. 도로와 보도, 가로수와 벤치, 광장과 골목—이 요소들의 질이 도시 경험의 대부분을 결정한다. 개별 건물의 아름다움보다, 그 건물들이 서 있는 가로의 질이 훨씬 중요하다. 서울은 최근 몇 가지 가로 환경 개선 사업을 진행했지만, 그 대부분은 표면적 정비에 머물고 있다. 보행 환경의 질, 자연 요소의 도입, 앉을 수 있는 공간의 배치—이것들은 소소해 보이지만 실제 도시 경험을 바꾸는 가장 빠른 경로다.
간판 규제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과 같은 방임적 상황은 공유지의 비극을 방치하는 것이다. 강력하고 일관된 간판 기준을 적용하되, 그 기준이 창의적 다양성을 허용하면서도 시각적 질서를 회복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서울 종로의 일부 구간이나 전주 한옥마을처럼 특정 구역에서 시범적으로 운용된 통합 간판 관리 사례들은 가능성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것을 예외적 특구가 아니라 도시 전반의 기준으로 확산시키는 정치적 의지다.

 


9. 장소의 기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재건축·재개발 과정에서 가장 조용히 사라지는 것은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장소의 기억이다. 수십 년에 걸쳐 쌓인 골목의 형태, 집들 사이의 관계, 상점들의 위치, 주민들이 오가며 만들어온 비공식적 경로들—이것들은 공식 도면에 기록되지 않고, 자산 가치 평가에 반영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쉽게 지워진다.
그러나 이것이 사라질 때, 그 공간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체성도 함께 지워진다. 사회학자 마르크 오제(Marc Augé)는 '비장소(non-place)'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공항, 고속도로 휴게소, 대형 마트—이런 공간은 기능적으로 완비되어 있지만 역사와 정체성과 관계가 없다. 최근 한국의 신규 아파트 단지들은 점점 더 이 비장소의 성격을 닮아간다. 어느 도시에 있어도 같은 이름, 같은 로비, 같은 통로, 같은 조경.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감상적이어서가 아니다. 장소감(sense of place)은 공동체 형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공유된 장소적 기억이 없으면,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기 어렵다. 자신이 사는 곳에 대한 애착이 없으면, 그 공간을 지키고 개선하려는 동기도 약해진다. 도시의 물리적 퇴화는 공동체의 해체와 함께 진행된다.
재개발이 불가피한 경우에도, 물리적 구조를 넘어 장소의 기억과 맥락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를 설계 과정에 통합해야 한다. 기존 도로망의 일부를 보존하거나 참고하는 것, 오래된 건물의 파사드 일부를 남기는 것, 주민들이 기억하는 장소의 이름을 새 공간의 이름으로 쓰는 것—이런 것들은 작지만 실질적인 연속성을 만들어낸다.

 


10. 어떤 도시를 선택할 것인가


지금의 도시는 우리에게 조용히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피곤한 공간을 만들었는가. 그리고 왜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도시의 형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해왔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도시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선택과 판단, 그리고 우선순위의 결과다. 효율을 앞세우고, 속도를 중시하고, 개별의 이익을 우선시한 선택들이 쌓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매일 느끼는 피로로 돌아오고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질서를 원한다. 완벽하게 통제된 환경이 아니라, 적당한 다양성과 예측 가능성이 공존하는 구조를 선호한다. 나무가 있고, 건물이 있고, 간판이 있더라도 그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 우리는 그런 환경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지금의 도시는 그 균형을 잃어버렸다. 한쪽에서는 아무런 기준 없이 모든 것이 튀어나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지나치게 획일화된 구조가 반복된다. 중간은 사라졌다.
변화는 거창한 재개발 계획이나 대규모 신도시 건설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별 가로의 간판 기준을 바꾸는 것, 저층부 공간의 용도를 다양화하는 것, 공원과 보도의 질을 높이는 것, 재건축 심의에서 인간 척도와 가로 활성화 기준을 강화하는 것—이 작은 조각들이 모여 도시의 성격을 바꾼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거를 자산 증식의 수단으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파트의 가격이 오르는 것과 그 안에서 사람이 잘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구조에서는 두 가지가 종종 역방향으로 작동한다. 가격을 높이는 요소들이 거주의 질을 낮추는 방향으로 설계되기 때문이다. 이 역설을 인식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우리가 살고 싶은 도시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크다. 그러나 그 거리는 좁힐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고, 정치의 문제이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도시는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소모시킬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이유를 모른 채 지쳐갈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그 선택을 지금,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환경심리학, 도시설계, 주거 정책의 교차점에서 한국 도시 환경의 문제를 짚고자 했다. 언급된 연구자들의 작업—얀 겔의 「사람을 위한 도시(Cities for People)」, 레이첼·스티븐 카플란의 주의력 회복 이론, 마르크 오제의 비장소 개념—은 이 논의의 이론적 기반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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