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내 잘못이라는 건 늘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나 스스로도 부끄러워하는 선택의 결과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들만 보고 판단하여 힐난할 때마다
억울함이 차올라서 나도 모진 말을 하곤 했었다
그러면서도 그 억울함에 자신은 없었다
엄마랑 긴 대화를 하고 나서 머리가 심장처럼 두근두근 거리는 걸 느끼며 무작정 잠들었는데
얽혀있던 문제들로부터 해방되어 한결 편안해짐을 느낌과 동시에, 나를 괴롭히던 그 복잡한 매듭이 잘리면서 엄마와의 관계 또한 함께 잘려나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이 가벼우면서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기 시작한 것 같아서 마음이 괴로웠다. 거실에 나가서 널브러져 있는 빨래들을 정리하고 방마다 옮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습이었다.
매해 시간이 흐를 수록 나와 엄마의 대화는 감정 싸움이나 설득, 논쟁보다는 차가운 분리와 선택의 문제로 기계화되어 갔다. 더 이상 누구도 화를 내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그러한 고요함 뒤에는 화해의 손길 대신 더 이상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한 각자의 완벽한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소리, 요컨대 철 부딪히는 소리와 톱니바퀴가 멈추는 소리 등이 들릴 뿐이었다.
그다지 심각한 문제로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제야 부모가 나를 완전히 포기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렇게 되도록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관계가 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나는 막아볼 의지도 없다. 돈 문제나 경찰, 병원 신세로 연락만 오지 않으면 어떤 삶을 살든 간섭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동안 자라면서 쌓인 만성적인 관계적 무력감과 인생에 대한 무능함 속에서, 마지막 남은 여생의 기로에 대한 선택권이라도 뺏기지 않고자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든 부모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부모가 미웠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게 경제적인 측면과 생활적인 측면에서 많이 어려울 때마다 먼저 도움을 주셨으니 감사함을 느낀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듯이, 나는 이 가족 누구와도 삶을 사는 방식이 잘 맞지 않는다. 사실 누구와도 잘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이렇게 혼자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것이니, 스스로 돈을 벌고 나중에 도움을 바라거나 폐를 끼치지 않는 조건으로 내 인생에 간섭하지 말아달라, 내 바람은 늘 그것 하나였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실천할 수 있을 정도로 의젓한 인간이 아니었고, 그것이 갈등의 씨앗이 되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실제로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처음부터 신경쓰지 않았던 것도 같다.
오히려, 내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으로만 살 수 있는 의존적인 존재라고 평소에 느꼈기 때문에, 더욱 가족으로부터 분리되고 싶었던 것이다. 언제나 내가 힘들고 지쳐있을 때, 그 히스테리와 경제적 어려움을 마지못해 도와주고 감내했던 것은 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가족이었다.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언제나 결국은 그렇게 되어버리는 게 싫었다. 그래서 누구한테도 의지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상처를 주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떨어지려고 해왔었다. 내가 도움의 손길을 뻗었을 때 주변에 아무도 없기를 바랐다. 내 육체는 그 순간에 엄청 울고 무너지겠지만, 내 양심은 그 순간에야말로 겨우 웃을 수 있다고 생각해왔었다.
도움을 받는 존재라는 것이 늘 괴로웠고, 내가 힘들 때 그들에게 먼저 도움을 요청하고 기대게 될까봐, 안 좋은 모습을 보이게 될까봐 늘 불안했다. 왜 나는 내 마음의 평온함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까지 극단적이고 모진 모습들을 보여야만 했었는지, 그들을 이렇게 추한 방식으로 분리했어야만 했는지에 대해 나는 아직도 의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할까?
나는 등가교환의 법칙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기 위해 칼을 빼들었고, 그것을 자르자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자리에 모이지 않았다. 내가 내 문제를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하여 자유로워지는 순간에, 그 문제를 매개로 얽혀있었던 수많은 관계도 함께 잘려나갔다.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결국은 이렇게 되길 어쩔도리없이 바라왔다는 점에서, 나는 후련함을 느끼면서도 무언가 시작부터 크게 잘못되어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나는 그 제1 원인을 몇 년 동안 계속해서 추적해왔지만, 절대적인 원인 같은 건 결국 없었다. 그냥 내 삶의 궤적 전체와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원인처럼 보였다.
그동안 줄곧 마음이 답답하고 뇌랑 온몸이 뜨거웠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모든 게 차갑게 느껴진다. 내 몸에 닿는 공기도 차갑고, 내 인생에 펼쳐진 기류 전체가 차가운 것 같다. 간사하게도, 나는 사람의 온기를 원할 때는 사람을 찾았다가, 막상 외로움이 가시면 필요없다며 돌아선다. 실은 내가 그 온기를 감당할 자신이, 상처를 주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정상적인 대등한 관계를 맺을 자신이 없어서 매번 도망쳤던 것이지만, 그런 구질구질한 변명보다는 그냥 내가 간사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결론이 훨씬 나를 더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더 이상 나를 정당화하고 스스로 변호하기 위해 나를 복잡한 인간으로 설명하는 것도 이제 지쳤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단순하게 파악해왔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나는 가진 것이 없으면서 자의식만 비대한 전형적인 인간답게도, 자기증명에 열심히 매달렸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딱히 내가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내가 보잘 것 없는 존재일 때 선뜻 나를 도와주고 존중해준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근래에 가장 난처할 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을 의지하게 될까봐, 내가 있는 진창 속으로 끌어내리게 될까봐 너무 두려워서, 내가 글을 다시 쓰게 되면 꼭 보내달라며 내 글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신 편집자님의 호의에 앞으로 글을 쓸 계획이 없다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그러나 그 기회를 놓쳐버리고 후회하기도 싫어서, 상황이 개선되고 스스로 진정 원해서 글을 쓰게 되는 날에는 꼭 다시 더 나아진 모습과 작품으로 연락을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편집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과 어머니와의 대화 등 오늘 하루가 통째로 반복되어 온 듯한 기시감을 느꼈고, 왠지 이 이야기의 끝이 해피엔딩은 아니었던 것 같은 느낌 또한 들었다.
하지만 해피엔딩이니, 새드엔딩이니, 그런 건 더 이상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사람들이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새드엔딩으로 여기고, 반대로 사람들이 새드엔딩이라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여긴 적이 많았었다. 그러니깐 끝이 좋든 나쁘든 그런 건 단지 해석의 차이일 뿐이다. 해석은 이야기를 쓰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의 세계 속에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 사람들의 해석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감정 자체를 느끼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 해석과 평가에 내 인생 전체와 존재 가치가 휘둘릴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나한테는 바보 같은 희망이 아직 남아있고 그게 얼마나 바보 같든지 간에 이제 나한테는 이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 바보 같은 희망 하나를 얻으려고 그동안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내가 가진 유일한 남은 것인 나만의 소중한 희망을 부정당할 때만큼은 평소답지 않게 이빨을 드러내기도 했었다.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들이 도처에 널렸지만, 이제는 내가 그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치든 당당하게 노력하고 싶다. 길에서 더 이상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싶지가 않다. 평생 바보라도 좋다. 노력하는 바보일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내 삶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계속 노력해보고 싶다.






